노예로 사는 삶 – 쇠사슬 자랑

‘노예로 사는 삶이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스스로 묶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라며 말이다.

미국의 극작가 리로이 존스(Leroi Jones)

 

먼저 이 글은 누군가에게, 아니 대다수 평범한 직장인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그들에겐  조금 불편하고 무거운 얘기일듯 싶다.

 

“김 차장님~ 예전 회사에서 맨날 야근 밥 먹듯 하곤 했는데! 여기 사람들은 일을 너무 편하게 하는 거 같단 말입니다~! ㅎㅎ”

“야! 김 대리! 그땐 다 그랬어~ 넌 S사 외주 안 해봤냐? 안 해봤으면 말을 말아~

구미 공단 아궁방이라고 들어봤어?

내가 거기 휴대폰 외주 개발할 땐 말이야~ 월화수목금금금에 매일 새벽까지 일하고 심지어 주말에 불려 다녔다! 자다가도 벌떡 나가서 일했는데 진짜 군대 있을때 5분 대기조가 따로 없었단 말이지!”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 아는가? 이 영화는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1994년에 제작된, 국내에서도 명작으로 알려진 미국 영화이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게 전개가 된다. 자신의 아내와 그녀의 정부의 살해범으로 누명을 쓴 주인공 앤디, 그는 쇼생크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만든 디스토피아 세계의 결정체인 감옥이라는 장소에서 탈옥을 결심을 하며, 탈옥을 위해서 매일 조금씩 자신만 아는 은밀한 공간에 구멍을 뚫으며, 뚫어 놓은 구멍 위에 ‘리타 헤이워드’의 대형 포스트를 붙여 이를 숨기는데 사용한다.

이후 그는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감옥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철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인 구멍 뚫는 행위를 매일 조금씩 반복한다.

결국 20년이 지난 어느 한 날 그는 탈옥을 시도하여 성공하게 되어, ‘자유’라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사실 이 ‘쇼생크 탈출’은 워낙 잘 알려진 명작이자 개인적으로도 내 인생 띵작이기도 하다.

내가 이 영화를 띵작으로 꼽는 가장 큰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속 쇼생크라는 감옥이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직장인들의 현실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랄까?

쇼생크란 폐쇄적인 감옥 사회는, 몇 명의 교도관에 의해 관리가 된다. 그런데 이즈음에서 곰곰이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자. 장소만 다를 뿐 우리내 직장 생활로 대변되는 사회 생활 역시 이와 결이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전체주의적인 다소 빡빡한 규율과 시스템으로 통제가 되는 조직생활을 생각하자면, 우리가 근무하는 회사라는 장소 역시 이와 흡사하지 않은가? 집단 구성원끼리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서로를 감시하는 그런 공동체 특성이 강할수록 감옥속 세상과 결을 같이한다는 불편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의견에 반신반의 하는 건 당연하다. 우린 어릴적부터 그렇게 공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편견을 깨기 위해 먼저 하드웨어적인 관점에서 봐 보자.

하드웨어적 관점

일단 지금 각자 앉아 있는 사무실의 자리 배치도를 보면 조금 이해가 빠를듯 싶다. 대부분의 관리자들은 꽤 높은 파티션에 둘러 쌓인 공간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클 듯 싶다. 즉 그 공간에서 서열이 높을수록 나름 프라이빗 한 모서리나 창가 가장자리 쪽에 등을 기대는 그림으로 배치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서열이 낮을 수록 어떤가?  이와 반대의 상황으로 그분들이 잘 감시(?) 할 수 있는, 최대한 눈에 잘 보이는 공간으로 배치된다. 이 구분이 귀찮은 경우는 보통 협업이라는 좋은 명분으로 일렬로 자리를 배치하곤한다. 또한 협업을 강조하는 조직일 수록  파티션도 아예 없거나 매우 낮게끔 설치되곤 하는건 대부분 공감이 갈 듯 싶다.

그 결과 상시 등 뒤로는 알 수 없는 어떤 기운이 느껴지는데, 누군가가 마치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듯 아닌 듯 알 수 없는 에네르기파가 느껴지는건 누구나 하는 경험아닌가? 이 한가지 예만으로 쇼생크 감옥 안에 배치된 그 시스템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또한 영화속 쇼생크 중앙의 높은 탑의 꼭대기에는 교도 소장이나 교도관들이 상시 감시하곤 한다. 그래야 수많은 수감자들의 일거수일투족 까지 제대로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수감자들은 교도관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감시자 입장에서는 이 불안감을 적극 이용할 수 있다. 반대로 간수들은 언제 어디서 감시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에게 순응하게 된다.

 

소프트웨어적 관점

다음은 소프트웨어적인 관점인, 근태 시스템 역시 이와 비슷하다.

이 시스템은 대다수의 직장이 도입하는 9시 출근 12시 점심, 6시 이후 퇴근 등 모든 것이 시간이라는 규율에 의해 통제된다. 사실 인체의 바이오리듬은 인간이 AI나 로봇이 아니기에 이러한 시스템에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 부자연스러움을 설명하려면 시간의 테입을 뒤로 감아 1차 산업 혁명 시기로 거슬러 가봐야 한다.

당시 공장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가급적 정시에 공장에 출근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인력들은 농경 사회 시스템에 적응된 인력인 것이다. 따라서 정시 출근이라는 이 지금의 AI혁명에 버금가는 이 혁신적인 규율이란 사실 그들에게 결코 맞지 않는 옷이었다. 지금까지 그들 몸에 밴 시스템이란 농경 사회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즉 해가 뜨면 눈뜨고 해가 지면 자면 그만으로 시간이란 정확한 개념 자체가 없던 시기였다. 그저 경작기 때는 조금 바짝 일하고 추운 겨울에는 그동안 열심히 수확해둔 수확물들을 서로 나눠 먹고 남은건 곡간에 저장해둔 후 휴식을 취하곤 했다. 어쩌면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자는 이 시스템이 인간 생태적으로 보면 산업혁명 생태보다는 받아들이기가 더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다.(물론 농경사회 역시도 그 이전 사냥하며 살던 시스템과 비교하면 또 부자연스러운 시스템이긴 하다… ) 어쨌든… 이런 이유로 당시 공장주들은 자신들의 명령에 순응하는 노동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공장주들이 모여 고민 끝에 내린 명분도 그럴사한(?) 솔루션이 바로 ‘공교육의 의무화’ 였다. 참고로 이 니즈를 최초로 주장한 철학자가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이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란 그의 저서에서 그는 ‘공교육의 의무화’라는 혁신적인 슬로건 아래 ‘의무 교육 시스템’의 필요성을 주장했었다.

교육은 자아와 국가의 일치를 위하는 것, 국민이 국가에 애국심을 갖고 희생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피히테의 독일 국민들에게 고함 중

결국 1819년, 프로이센에서 의무교육이 최초로 제정된다.

그리고 이 교육 제도를 1차 산업 혁명 시기의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던 영국에서 차용한다. 공장주들은 자신들의 말에 순응하는 훈련된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결과 또한 괜찮았던 것이다. 물론 이 훌륭한(?) 시스템은 입소문으로 여러 나라에서 차용되기 시작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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