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삶 2 – 익숙함과의 이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석유왕 록 펠러 역시 같은 목적으로 1903년 일반 교육위원회(GEB, General Education Board)를 설립하게 된다. 그의 보고서에는 평소 차분한 그의 성격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GEB 설립의 목적을 드러냈었다.

“우리의 목표는 학교를 통해 사람들을 규칙에 순응하도록, 지배자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이고 가르치는 것이다. 관리 감독과 지시에 따라 생산적으로 일하는 시민을 양산하는 것이다. 권위를 의심하는 태도,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 이상을 알고 싶어 하는 태도는 꺾어버려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엘리트 지배 계급의 자녀들에게만 제공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그저 하루하루 즐기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하는, 숙련된 일꾼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 교육이 그들에게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 록 펠러

이쯤에서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어떤 의구심이 들 듯 한데… 문제는 21세기 현재를 사는 지금도 그들이 만든 이 시스템이 꽤 훌륭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국민) 초등학교 역시도 록 펠러가 공립학교를 설립할 당시의 목적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그 누구도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의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왔고 그렇게 새뇌가 되었기 때문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라. 초등학교에 가서 제일 처음 배우는 노래가 무엇인가? 바로 ‘학교 종’이란 노래를 모르는 사람을 없을 듯 싶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의 가사만 봐도 록 펠러의 그 목적에 부합한다는 불편한 진실이 들어난다.

그렇게 12년 동안 의무를 짊어지고 순응하며 훈련을 잘 받은 잘 훈련된 우리들은 록 펠러가 주입한 그 정신으로 무장되어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12년간 있었던 공간과 꽤 비슷한 향이 나는 직장이라는 장소 역시 전체주의적인 시스템을 기본으로 하는, 저마다의 직장이란 장소에서 사회의 한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도 등교시간이 근무시간으로 단어만 조금 바뀌었지만, 어쨌든 학교 종이 땡땡땡처럼 누군가가 정해둔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퇴근하는 너무도 당연한 그 시스템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자주 어기거나, 아니면 자신이 왜 이런 산업혁명 시대에나 있을 법한 근태 시스템을 따라야 하냐면서 따진다면, 아마도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해 보인다.

저마다의 근태 시스템에 의해 제제 또한 우리는 당연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이것은 불과 몇 년 전 팬데믹이 만연했던 상황에서도 김 부장들이 좀 더 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 원격 근무나 유연 근무제를 못마땅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얘기가 좀 삼천포로 빠졌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 보자.

이렇듯 현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20, 30, 40, 일부 50 직장인들은 쇼생크 감옥과 같은 전체주의향이 물씬 나는 이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은 이미 꽤 오랜 시간 동안 암묵적으로 집단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무의식 세계를 지배해 온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꽤 오랜 세월 동안 무의식의 체면에 걸려 살아왔었다.

그리고 소위 ‘월급 중독자’였던 나는 머리를 세게 때려 맞는 경험을 하면서 어느 날부터 쇼생크의 주인공 ‘앤디’와 처럼 큰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궁극적으로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물론 이 영화 한 가지만의 이유는 아니다.

여기에는 알게 모르게 여러 계기도 있었지만, 이 영화 역시도 꽤 내 머리를 세게 한방 때리는 동기를 준 계기인건 확실다.

다행히 지금은 결과적으로 봐도 이 의식적인 훈련 탓에 ‘월급 중독’에서 꽤 벗어날 수 있었고, 결과적인 얘기지만 지금은 직장인 신분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상태이다.

이렇게 내가 나름의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각자 장소는 다르지만 주인공 ‘앤디’가 쇼생크에서 했던 과정과 결은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다. 즉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름 어떤 행위를 매일 반복하였기 때문이다.

이 행위란 사실 너무 간단하고 뻔하긴하다. 가장 기본은 저축이고 두 번째는 투자 나머지 한 가지는 사업이라기엔 조금 부끄럽지만 어쨌든 사업이다.

또한 나는 감옥에서의 앤디를 벤치마킹했다.

앤디 : 감옥에서는 자신의 계획을 숨긴 채 동료들의 앞잡이가 된다.

그리고 교도소장의 비위도 맞추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는 충성과 타협을 한다.

나 : 회사에서 나는 마음에는 내키지는 않지만 최대한 내 성격(?)을 드러내지 않고 어쨌든 그들과 잘 지낸다.

간지럽지만 관리자들과 내 보스의 비위를 맞추는 타협도 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필요할 때는 보스의 편의에 서서 그의 비위를 맞추는 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월급 중독, 직장 노예 탈출, 즉 앤디처럼 자유인이라는 목적을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여기서 예외 상황도 물론 있다.

쇼생크 탈출의 모범수 레드처럼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탈출 되는 것이다. 즉 모범수로 가석방될 수도 있는 것이다.

회사로 보자면 권고사직이든 명예퇴직이든 또는 이직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신이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것은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결론이다. 회사 밖에서 자유를 누리며 그동안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면 된다. 이와 반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 레드처럼 자유라는 현실이 또 다른 구속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익숙했던 감옥 생활을 그리워하며 다시 돌아가려는 시도를 고민 하게 될 것이다. 현실 사회에서도 수많은 퇴사자들이 이 익숙한 그 시스템과 결코 결별하지 못하고 재 취업을 하는 상황을 우리는 심심찮게 보곤한다.

어떤가?

쇼생크 감옥과 이 현대를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삶이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이지 않는가?

당신이 진정 자유를 원한다면, 이 세계를 아는 것부터 시작이다. 그리고 익숙함과 이별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 그토록 바라던 그 자유가 자신에겐 또 다른 구속 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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